예전 회사에서 일을할때 평택에 거래처가 있어서 종종 평택에 가곤했습니다.평택IC에 들어가고 바로 신호 하나가 나오는데 좌회전을 받기위해서는 무조건 이길을 가야하죠 가보신분은 알겠지만 그 길목에 플랜카드 하나가 걸려있습니다.바로 실종자를 찾아달라는 현수막인데요 이제는 너무나 유명해진 송혜희양에 대한 현수막입니다.처음 봤을때는 약간 부끄럽지만 그냥 사람이 하나 없어졌나보구나 하고 넘겼습니다.그런데 평택에서 봤던 이 현수막을 서울에가서 한번 경기도에서 한번 보게 된겁니다.그때서야 정말 이 실종사건의 가족들이 너무나 애타게 타고 있구나 하고 더욱 실감할수 있었죠.그때부터 더욱더 자세하게 알아본 결과 참 씁쓸하고 마음아픈 최근의 소식이 들려오더군요.
실종된 송혜 좀 찾아주세요 란 문구가 너무 절박해보이는 현수막
사건의 경위를 살펴보자면 지금으로부터 15년전인 1999년 2월13일 평택의 도일동 하리부락
당시 실종자의 아버지 송길용씨는 아내와 두딸과 살고있는 평범한 가장이었습니다. 실종자 송혜희양은 둘째딸로써 당시 18살 고등학교2학년생 전교1등을 할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고 장학금까지 받는 집안의 보물과도 같은 존재였다고 합니다.
2월13일 학교가끝난 오후 5시쯤 송혜희는 남자친구의 집 송탄서정리에 가기위해 외출을 하였고 시간가는줄 모르고 놀다가 오후 10시가 되서야 다시 평택 집으로 가는 막차에 탔다고 합니다.
친구와 헤어진 경기도 송탄과 평택집은 약 5키로정도의 거리가 있고 버스로 10~15분 정도 거리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송혜희의 동네는 사람의 인적이 드문 동네였고 버스에서 내릴쯤에는 송양과 30대의 성인남자 둘만있었다고 합니다.
송양이 내린 도일 주유소앞은 논과 산밖에 없어 불빛도 없고 인적도없고 버스를 빼면 차도 거의 없는 곳이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서는 마지막 내릴때 송양과 30대의 남성이 같이 내렸다는 것이죠.
결국 다음날 14일 새벽까지 돌아오지않은 송혜희양을 부모가 신고를 한 후 실종처리가 됩니다. 그후 경찰은 바로 수사에 착수하지만 아무 단서가 없었습니다.단서라고 해봤자 버스기사의 증언이 전부였던 상황
증언에 의한 30대 남성의 정보는
오리털파카와 모자를 푹눌러쓴 남자 얼굴 확인은 불가
등산화를 착용
평택시내에서 버스의 탑승
술냄새가 났다.
이렇게 정확한 단서없이 수사를 하니 성과가 있을리 만무했고 급기야 경찰은 수사를 잠정적으로 중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때부터 송양의 아버지 송영길씨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직접 전단지와 현수막을 걸고 다니며
경찰도움없이 개인적으로 조사를 하고 다닌것입니다.하던일을 그만두고 전단지와 현수막을 사느라 이미 엄청난 빚을 지게 되고 안타깝게도 부인은 우울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이 송혜희양 실종사건의 공소시효는 이미 2014년에 지나버렸습니다...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공소시효가 중요한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자식과 아내까지 잃은 아버지 송영길씨의 입장에서는 범인을 떠나 딸의 행방만이라도 확인하고 싶은 그마음뿐일겁니다.
이렇게 찾는과정중에 어이없는 전화도 엄청 받았다고 합니다.전단지와 현수막을 본 익명의 사람들이 술집과 사창가를 말하면서 송혜희를 찾고싶으면 돈을 달라는 허위협박전화가 난무했다는것이죠. 실종자의 가족들에 아픔을 더욱더 헤집어놓는 그런 몰상식한 인간들 정말 분노가 치밀어오릅니다.
개인적인 간절한 바램은 이미 파탄이 난 가정과 경제사정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딸을 찾고 있는 송길용씨가 건강이 안좋아지기전에 딸의 소식을 듣게 되는것입니다.물론 살아서 멀쩡히 만난다면 더할나위없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딸의 행방만이라도 들었으면 합니다.그렇지않고서 이렇게 세월이 더지나 송길용씨가 세상과 이별을 하게된다면 정말 그보다 큰 한은없을겁니다. 물론 사건자체가 단서없는 힘든 사건이고 공소시효가 지났지만 그래도 최대한 많은 관심과 제보가 필요할것 같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또하나의 바램은 이 아버지의 후원계좌가 있더군요 조금의 힘이라도 보태기 위해서 저도 큰돈은 아니지만 소정의 금액을 후원할 생각입니다.
농협 205030-56-194211 송길용